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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기

제목 그리스는 예뻤다 - 구약학회 유연희 박사님의 후기입니다
작성자 로뎀네트워크 작성일 2018-08-27 15:32:53
여행의 시작은 비행기표를 살 때부터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번엔 단체여행이라 그런지 내 여행은 공항에서 시작되었다. 학회가 준비한 7박 8일(7월 9-16일)의 그리스 여행팀 이십여 명, 낯익은 얼굴과 낯선 얼굴이 절반씩 섞여 있었고, 배우자도 몇 분 오셨고, 남녀가 약 절반씩이었다. 여행은 항상 옳다. 밀린 일거리가 그대로 있는데 여행 날짜가 번개처럼 다가왔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는 틀렸다. 열심히 일하지 않았어도, 많은 성과가 없었어도 여행해도 된다. 해야 한다. 공항은 기다림의 공간이다. 시내버스 1분을 못기다리는 도시인들도 기꺼이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하는 곳이다. 낯선 사이에 대화도 하게 만든다. “요즘 어떤 주제에 관심 있으세요?” “저는 성서 이야기와 여러 겹의 독서 반응에 관심 있어요.” “성숙하기 위한 공부는 어떤 걸 하세요?” “어릴 적엔 칭찬 받기 위해 공부하고 학위도 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지만, 성인으로서 새로 짜는 삶은 무엇인가요?” “학교와 교단의 부패나 불합리함을 보며 저는 신학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논문보다는 책이 대중이 접근하기 쉬워서 얼른얼른 책으로 내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 이 여행은, 떠들기 좋아하는 내가 귀 기울여 듣는 연습을 하기에 딱 좋은 기회렷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상대가 무언가 나보다 못한 것을 찾거나 그렇게 상상하고 판단하여 상대를 작게 만들려는 것은 거의 본능이다. ‘나의 그런 생각들을 빨리 알아차리고 가벼이 지나가게 해야지. 대신 이 사람은 내게 무언가 배움과 깨달음을 줄 스승이라고, 내가 모르는 귀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여행 동안 내가 행복하게 해주어야할 사람, 실은 나의 일부라고 생각해야지.’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하고 나니, 여행에 임하는 내 존재 방식을 창조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보탬이 되는 존재, 즐겁게 해주고 칭찬하는 존재로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미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중 몸이 불편한 회원이 있었는데, 다른 회원이 짐을 미리 택배로 받아 가져왔다. 휠체어를 미는 그 친구, 두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주변에서 말한다. “내 물건 중 가장 예쁜 모자를 그만 두고 왔어요.” “나도 모자를 깜빡 두고 왔는데.” 사실 우리는 다 무언가를 두고 왔다. 난 토비를 두고 왔다. 내가 없으면 안방에 쉬야를 하는 냥이 녀석이다. 또 내가 없으면 “하늘나라의 평화가 이 땅에 임하는” 경험을 한다는 남편을 두고 왔다. 첫 끼니부터 탄수화물 덩이인 짬뽕을 마누라 잔소리 없이 먹는다니 얼마나 맛있을까. 이참에 나도 그리스에 내 잔소리 재능을 좀 두고 와야 할텐데. 밤새 날아 새벽에 도착한 아부다비 공항. 서너 시간 기다려 아테네 행으로 갈아타야 했다. 공항면세점은 세계적인 브랜드 상품들이 점령해서 어디나 똑같다. 여긴 장난감 가게의 동물인형이 곰이 아니라 낙타인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근데 장난감 가게에서 내가 만행을 저질렀다. 여아 장난감, 남아 장난감 코너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바비 인형류와 자동차류가 차례로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큰 바비 인형을 남아 장난감 선반 한 가운데로 옮겨두고 도망나왔다. 고린도(코린토스)아테네 공항에 이른 오후에 도착한 후 전세버스로 서쪽으로 78km 떨어진 고린도로 이동했다. 버스로 긴 시간 이동할 때마다 가이드의 설명이 나왔다. 가이드는, 그리스에서 약 30년을 자녀를 키우며 이웃과 교류하며 산 한국 여성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그리스의 문화와 사람들에 대해 찰지게 들려주었다. 가이드의 걸죽한 입담에 우리는 때로 포복절도했고, 신화와 역사와 현실이 뒤섞여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리스의 특이한 자연환경과 사람살이를 배우고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스는 발칸 반도의 최남단에 있고, 위로는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있고, 동쪽에 터키가 있다. 남서쪽에는 이오니아해, 남쪽에는 지중해, 동쪽에는 에게해가 있다. 국민의 98%가 그리스인이며, 그리스어를 쓴다. 부활절을 기준으로 겨울과 여름으로 나뉘는 나라. 여름엔 지중해성 고온으로 산과 들이 한국처럼 진녹색이 가득하지 않다. 올리브나무 같은 관목이 많고 다육이 큼직하게 잘 자란다. 산은 국토의 20프로이고, 관목 숲이라 멀리서는 빈 곳이 많이 보인다. 그래도 북쪽에는 소나무 삼림이고, 눈, 비가 내려 벼농사도 짓는다. 그리스는 8년째 IMF 상황이다. 국가는 가난해도 개인은 그렇지 않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그리스는 농업과 제조업이 주요 산업이다. 국가 부채로 그렉시트의 위기를 겪었지만 구조조정을 하며 극복하는 중이고, 특히 요즘엔 인구의 세 배인 3200만 명의 관광객이 GDP의 20%를 벌어주므로 경제위기 극복에 큰 도움을 준다. 지방을 다니니 곳곳에 문닫은 가게들이 많아 경제가 여전히 어렵다는 것이 보인다. 국토(남한의 1.4배)에 비해 인구(1100만)가 적으니(인구밀도 82명/㎢; 한국은 515명/㎢), 수도 아테네(약 400만)만 벗어나면 어디든 널널하다. 색다른 산과 들을 보면서 오니 금방 고린도이다. 오늘은 시간상 고린도 운하와 바울 기념교회(정교회)만 방문한다. 고린도 운하는 지중해와 에개해를 잇는 좁은 운하로서(길이 6km, 넓이 21m, 높이 70m), 19세기 말에 완성되었다. 현재는 산업이 아니라 관광 목적으로 배가 다닌다. 다리 아래로 좁고 깊은 운하가 근사했다. 고린도는 기원전 7, 6세기에 인구 60만이 넘었던 부유한 항구도시였고,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도시국가였다. 성서에는 고린도가 사람이 몰리고, 상업이 성하고, 돈이 넘치고, 타락한 도시라고 묘사되어 있다. 지금은 인구 3만의 지방도시이다. 구 고린도는 1858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또 1928년과 1933년에 각각 지진과 대화재로 파괴되었고 다시 재건되었다. 바울은 구 고린도에서 일년 반동안 활동했지만 기념교회는 신 고린도에 있다. 바울 기념교회에는 왼쪽에 베드로 사도, 오른쪽에 바울 사도의 모자이크가 있고, 교회 입구 오른쪽의 대리석 판에는 고린도전서 13장:1-8이 새겨있다. 바울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반유대주의 정책(45년)에 따라 고린도로 이주한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전도하였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그런 사람들이었고, 바울은 이 부부와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다(행18:1-4). 우리는 고린도에서 동남쪽 11km에 위치한 겐그리아 항구(케흐리에스)에서 묵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겐그리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롬 16:2). “이렇게 그리스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고 마치려니 아무래도 오늘 내가 우리 일행에 부담을 준 사건을 고백해야 하겠다. 우리 그룹을 즐겁게 하고, 도움이 되는 존재로 여행에 임하겠다고 했는데 하루도 못가서 망했다. 가이드가 고린도의 부패상에 대해 설명할 때 “고린도에 동성연애가 성행했고요, 왜 레위기에도 동성연애하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했잖아요”라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저기요, 동성연애가 아니고 동성애이고요, 학계에서는 오늘날의 동성애가 성서의 동성 성행위에 대한 언급과 같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성서를 그렇게 곧바로 인용해서 현대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버스 안은 순간 모종의 고요가 감돌았다. 불과 한 주 전에 우리 교회의 스무살 남짓의 게이 교인이 자살을 해서 애통하며 화장예배와 납골당안치예배를 집전했던 나로서는 그 순간 튀어나올만한 말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우째, 엄청 보수적인 배경에서 오신 분들도 있는데. 오늘은 일단 자고 보자. 고린도에서의 둘째 날이다. 그리스에서의 아침 식사는 처음인데, 나는 지중해식 아침 뷔페가 넘 좋아서 매끼 그렇게 먹고 싶었다. 식사 후 곧장 고린도 유적지로 향했다. 유적지는 해발 575미터의 아크로코린트 돌산의 성채 아래에 있었다. 도리아식 아폴론 신전(기원전 6세기)의 남은 기둥(원래 38개 중) 7개와, 헤라 신전, 옥타비안 신전, 페레 샘, 극장, 별장, 상점, 목욕탕, 그릇 만드는 곳, 체력 단련장, 개선문, 도시 중심부에서 항구까지 돌로 포장한 도로, 바울이 재판받던 비마 터(행 18:12-17)가 있었다. 옆 박물관에는 얼굴 없는 조각상들을 비롯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회당이라는 말이 새겨진 대리석 조각, 메노라 셋이 부조된 조각을 보며 고린도까지 와서 유대교를 간직한 사람들과 불원천리 찾아와 그들에게 예수에 대해 가르친 바울에 대해 한동안 생각했다. 올림피아우리는 다시 서쪽으로 두 시간쯤 달려서 고대 올림픽이 열린 작은 산간도시 올림피아에 갔다. 세계문화유산(1989년에 등재)인 올림피아는 독일 고고학연구소가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올림피아는 델피와 더불어 도시국가가 아니라 성소였다. 유적지에는 제우스 신전과 보물창고들, 페이디아스의 공방, 레오니데온(기원전 4세기에 건축가 레오니데스가 지은 숙박시설), 필립페이온(기원전 4세기에 필립 2세가 세우고 아들 알렉산더가 완성한 이오니아식 원형 건물), 헤라 신전 등 고대 건축의 걸작들이 밀집한 곳이고, 체육관, 짐나지움의 죽 늘어선 기둥들, 경기장, 크로니오스 언덕 등이 있다. 기원전 10세기에 올림피아는 제우스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기는 기원전 800년 경부터 그리스 세계로부터 많은 참가자가 모여 정기적으로 신에게 바치는 행사였다. 제우스상은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황금과 상아로 장식하여 신전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고대 올림픽이 중단된 후에 콘스탄티노풀로 옮겨졌다가 기원전 5세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을 모신 헤라 신전이 형태가 가장 많이 남아 있어서 현대 올림픽의 성화 채화는 이 신전 앞에서 한다. 누군가 올리브 가지를 엮어 관을 만들어서 우리는 돌려가며 머리에 쓰고 사진을 찍었다. 운동장은 길이 192미터, 폭 28미터의 직사각형이었다. 이 더운 햇살아래 몇 사람이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뛰었다. 2500년을 넘어 같은 운동장에서 뛰는 사람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근처의 아르케메데스 박물관에서 유물 전시도 보았다. 우리는 다시 아테네로 서너 시간 달렸다. 가이드는 어떤 침례교 교역자 성지순례 팀에게서 ‘교역자 이동 중 퀴즈’라고 하는 귀한 문건을 얻었다며 우리에게 퀴즈를 알아맞히라고 했다. 출산을 장려하는 한국정부가 싫어하는 속담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찬송가는? 세상에서 가장 야한 닭은? 다른 문제는 기억이 나지 않고, 이건 내가 다 맞춘 것인데, 상품이 있었다면 더 실적이 좋았을 것 같다. 답은 ‘무자식 상팔자, 열받아(바다), 썰렁해, 예수가 내게 계시니 시험이(시어머) 오나 겁없네, 홀딱’이다. 저녁으로 한식을 먹었다. 가이드는 우리가 한식에 열광하지 않는 이상한 한국팀이라고 했다. 외국서 오래 산 사람들이 많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피레우스 항에서 야간 페리를 타고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배는 35,000톤에 700개의 침대, 1500명을 수용하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식당, 카페 등이 있는 정기선이다. 단체할인 가격이 64유로였는데, 침대칸이 아닌 대합실에서 앉아가는 경우 15유로라고 한다. 욕실과 옷장이 딸린 침대 배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고, 밤 10시에 출발해서 아침 6시에 도착하는 배였다. 갑판의 카페가 늦은 밤에 문을 닫을 때까지 우리 몇 사람은 강한 바닷바람을 쐬며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무슨 얘기였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크레타 섬영토의 20%가 섬인 그리스에서 크레타는 가장 큰 섬이다. 지중해에서 5번째로 큰 섬이고 제주도보다 4배가 크다.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이 꽃피운 곳이다. ‘유럽’의 어원, ‘에우로파’ 신화가 나온 곳이다. 제우스는 페니키아 공주인 에우로파를 보고 반해 하얀 황소로 변신해서, 에우로파를 등에 태우고 놀다가 지중해 건너 크레타 섬에 정착했다는 신화이다. 크레타는 로마, 아랍인, 베네치아, 터키 오스만제국 등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고, 1912년에 그리스와 합병되었다. 우리는 이라클리온 항에 도착한 직후 크레타 출신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무덤을 먼저 방문했다. 카잔차키스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미할리스 대장,’ ‘성자 프란체스코’ 등을 썼다. 그의 작품에는 자유로운 크레타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어서 정교회가 불편하게 여겼다. 어린 신학생 때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읽으며 예수와 마리아의 청춘관계를 다룬 부분에 대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카잔차키스는 내부부장관, 복지부장관을 역임했고, 두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였지만 수상을 못했다. 무덤은 이라클리온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화려한 무덤을 원치 않는다는 유언에 따라 투박한 돌단과 십자가가 전부였고, 관광객이 주위에서 따다 둔 작은 유도화가 있었다. 우리는 크레타 출신 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를 들으며 유적지로 이동했다. 크레타의 유적으로는 크노시스 궁전이 남아있었다. 신화 속 제우스와 에우로파의 세 아들 중 큰아들이 미노아 문명(기원전 3650년경-1170년경)의 전성기를 이끈 미노스 왕이다. 크노소스는 미노스 왕국의 수도였다. 궁전은 160-170m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에, 2-5층의 건물은 ‘미궁’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1400여개의 방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궁전과 별궁, 신하들의 주거 공간, 일반 주택, 사제들이 있던 제단, 금속과 석재 가공소, 곡물 저장소, 수세식 화장실, 벽화와 도기 등 화려한 해양문화가 있었다. 궁전을 중심으로 반경 2㎞ 주변에 8만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황소 머리 모양, 공주들의 벽화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유적지는 영국 고고학자 에번스가 발굴과 복원, 연구에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관적으로 복원을 시도하며 상당부분을 훼손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고, 나도 보면서 어디까지가 원래 모습인지 안타까웠다. 박물관에서 4천년 전에 존재한 크노소스 궁전에서 나온 그릇과 잔, 무기, 다양한 금 장신구, 가슴을 드러낸 채 뱀을 들고 있는 여신상, 역동적이고 화려한 색채의 벽화 원본을 보며 눈호강을 했다. 점심에는 양고기 스테이크, 작고 뾰족한 야생 올리브, 성글고 작게 열린 녹색 포도를 맛나게 먹었다. 오후에 휴식을 하니 피곤이 좀 풀렸다. 그간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 데이터 거지로 살다가 호텔에서 인터넷을 하니, 크레타 문명인이 아닌 이 현대 문명인이 아주 살 것만 같았다. 집 소식을 듣자니, 냥이는 엄마가 없어서 이틀쯤 식음을 전폐하다가, 남편에게 알랑방구를 뀌며 적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녀석은 좀 영재라서 거울도 볼 줄 알고, TV의 새나 공을 잡으려고 반응한다. 홈스쿨링을 잘 시켜서 하버드에 보내려 한다고 내가 자랑질하는 러시안 블루 냥인데, 유기동물센터에서 어떻게 이런 녀석이 우리 품에 왔나 모르겠다. 관광객 식탁 옆에 앉아 올려다보며 인내심 있게 먹을 것을 기다리는 냥이를 보자, 울 냥이가 많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유적지에 가도 늘어지게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개와 고양이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의 괴롭힘을 겪지 않았는지, 누가 지나든 말든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오수를 즐겼다. 한국 친구들은 카톡으로 방탄커피 다이어트의 성공 사례를 알려왔다. 본인은 기미가 사라졌고, 남편은 배가 쏙 들어갔고 아들이 3주 만에 5키로가 빠졌다는 둥 보고한다. 다음 모임까지 함께 그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숙제였는데 나는 그리스에서 최선을 다해 먹느라 폭망했다. 그래도 질세라, “저는 시방 그리스임다. 지중해식 만찬을 마다하는 것은 여행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합리화를 하기로 했습니다.”고 했다. 답변은, “그리~~~스? 지중해식 만찬? 부럽슴다.”라고들 했다. 난 잠시 의기양양했지만 속으로는 찔려서 ‘한국 가서 꼭 살 빼야지’라고 생각했다. 저녁에는 어슬렁거리며 시내 구경과 더불어 디도교회에 갔다. 크레타는 어디든 관광객으로 북적거렸다. 교회는 바닷가로 이어지는 대로변에 있었다. 정교회는 마을의 중심이고 사람들이 하루 한번쯤 들른다더니 어린이들이 예배당 안까지 들락거리며 놀고 있었고, 그 모습이 참 예뻤다. 디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크레타에 왔다가 디도에게 크레타 사역을 맡겨서 생겼다. 성서에는 “그레데(크레타)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디도서 1:12)라고 나온다. ‘어떤 선지자’의 개인적인 판단이 성서에 실려 영원히 남겨진 것은 크레타 사람들에게 정당하지 못하다. 디도는 그런 평판을 뛰어넘어 사역했고, 정교회는 최초의 감독이라고 하고, 오늘까지 기념되고 있다. 산토리니(씨라) 섬크레타에서 하룻밤 묵은 후 다음 날 아침에 배로 두 시간 쯤 타고 산토리니로 이동했다. 역시 지진이 발생했던 섬이라 83%가 물속에 잠겨 있다고 한다. 크기는 크레타의 110분지 1에 불과하고 만 명의 주민이 200만 명의 관광객을 상대하는 곳이다. 물론 휴가철에는 사람들이 그리스 본토는 물론 유럽에서까지 와서 일을 한다고 한다. 크레타 현지인들은 주로 관광에 종사하고, 일부는 포도농사를 한다. 포도는 조합으로 생산하고 재래식 포도 맛과 향을 일률적으로 만든다고 한다. 포도나무가 아닌 포도넝쿨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돌돌 말린 식의 농사였고 온 섬에 가득했다. 산토리니의 여러 마을 중에서도 중심지인 피라와 이아마을을 방문했다. 이아는 그리스의 상징 색인 하양과 파랑으로 건물을 칠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교회들의 지붕이 파랗다. 절벽에 통일성 있게 지은 집들이 특이하다. 소상인만 입점하도록 규제가 있어서 올망졸망한 상점들이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다. 작은 교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이웃 어떤 사람이 안된다고 막는다. 개인 교회라는 것이다. 고인을 기념하여 가족 교회를 종종 짓는 게 풍습이라고 해도, 교회 앞에서 사진도 못찍게 하다니 그 사람이 인색하다고 생각했다. 점심식사는 주로 튀김 일색이어서 놀랐다. 문어와 한치는 구웠지만, 새우, 호박, 감자, 생선이 모두 튀김이어서 ‘거참, 이 더위에 튀김 잔치라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후식으로 꼬마 아이스크림 바가 나와, 나는 음식 궁합의 달인인양 ‘튀김과 상극 아닌가’고 속으로 불평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하도 잘 얻어먹어서 불평꺼리도 되지 않았다. 일행 중 처음 대화한 사람과 산토리니 이아마을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무엇이 젤 즐겁나요?”라고 묻자,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에 기대가 컸어요. 물론 만남에는 실망과 상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난 사람들과 만나는 게 좋아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단체관광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다니, 나는 좀 낯선 환경, 낯선 경험을 기대하는 편이라, 신선하게 들렸다. 피아마을에 있는 가톨릭성당에 들어가보았다. 놀랐다. 지금껏 본 정교회와 내부도 건축양식이 똑같다. 기도 제목의 촛불을 켜서 꽂는 입구, 중앙의 큰 샹데렐라, 아이콘으로 빽빽한 벽과 천장, 천장 복판의 예수 그림, 지성소 등 물리적으로 똑같았다. 98%가 정교회이고 개신교는 2만명, 가톨릭도 소수이다 보니 정교회와 비슷해야 살아남기 좋았을 것이다. 해가 8시 37분에 진단다. 석양을 보려면 꽤 기다려야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무리가 큰 소리로 떠들며 대화하는 것이 문화이고, 3대 스포츠가 축구, 농구, 이바구라니 우리도 적극 이바구를 하며 석양을 기다렸다. 절벽에 총총 지은 하얀 집들과 파랑 지붕의 교회를 붉게 물들이며 해가 바다로 졌다. 오랜만에 석양을 보았지만 한국 석양과 무엇이 다르랴. 다만 석양을 보겠다고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골목과 마을을 가득 메운 것이 진풍경이었다. 우리는 호텔이 있는 피아마을로 돌아와 저녁을 10시에 먹었다. 1학년부터 고3까지 학교도 2시에 마치고, 공무원도 2시에 퇴근하여 늦은 점심과 오수를 즐긴 후 저녁을 늦게 먹는다는 그리스 사람들처럼 드뎌 우리도 한밤에 저녁을 먹은 것이다. 과연 식당은 초저녁인양 북적거렸다. 신선한 샐러드와 굵직한 문어발 스테이크는 만 8천 걸음으로 지친 하루를 잘 어루만져주는 식단이었다. 델피다음 날 산토리니 공항에서 아테네로 한 시간 날아갔다. 국내선에서 물 한잔 주더니 사탕을 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작은 사탕 한 개뿐이라니, 무슨 깊은 뜻이 있을지도...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약 370㎞ 떨어진 메테오라를 향해 가는데 종일 걸렸다. 중간쯤에서 델피 성소에 들렀다. 창밖은 줄곧 산과 들 뿐이고 차량도 별로 없었다. 핀도스 산맥 끝자락의 테살리아 평야, 그리스 제 1 곡창지대라고 한다. 그리스는 산, 강과 하천 등 신화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또한 학교에서 신화와 역사를 열심히 가르친다고 한다. 그래서 “발굴되면 역사이고, 발굴되지 않으면 신화”라고 한다. 창밖 풍경은 질리지가 않았다. 누군가 혼잣말을 했다. “이런 경치,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것 같아.” 정말 그랬다. 파르나소스산 동쪽 비탈 900미터 높이에 지은 델피 성소는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나다. 뒤로 바위산 병풍이 둘러서 있고, 앞으로 평야가 있고 맞은편에 또 산맥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델피(델포이) 성소는 고전기 그리스 시대 가장 중요한 신탁이었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진 곳이자,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땅의 배꼽 움팔로스가 놓여있던 곳이다. 신화에 따르면 원래 델피는 대지의 모신인 가이아가 남성 없이 낳은 아들 피톤의 신탁 성소 피토였다. 아폴론이 이 신탁 성소를 차지하려고 거대한 흑뱀인 피톤을 죽였고 그 후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 아폴론은 가이아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8년마다 피톤의 죽음을 애도하는 피티아 제전을 열어 경기와 제물을 바쳤다. 내 귀에는 가이아와 아폴론 얘기가 여신과 남신의 대결, 권력의 교체 얘기로 들렸다. 어쨌든 이곳에서 기원전 586년부터 4대 범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열렸다. 신탁 성소의 이름이 델포이로 바뀌었어도 신탁을 주관하는 무녀(시빌)는 피톤에서 딴 피티아라는 호칭으로 계속 불렸다. 가이아의 뿌리 깊은 전통을 없애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폴론의 신탁은, 피티아가 신전 지하의 아티톤 성소에서 신성한 샘물이 흐르는 곳 위에 트리푸스(삼발이 의자)에 앉아서 받았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증기를 마시고 월계수 잎을 씹어먹고 몽롱한 상태가 되어 수수께끼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 신관이 적었고, 신탁 내용을 절대시했다고 한다. 수수께끼 같은 말은 지혜로운 방책이다. 신탁이 틀렸다고 하면, 해석이 틀린 거라고 받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지질학자들은 흙 속 에틸렌이 환각효과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밝혔다. 무녀 역할은 원래 젊은 여성이 했다가,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후에는 50세 이상의 여성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폴론의 신탁을 받기 위해 원근각처에서 몰려들었고, 먼저 신탁을 받으려고 다양한 연줄과 봉헌품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신전과 경기장까지 높은 산악지대에 지은 것은 그렇다 쳐도 교통 사정도 좋지 않은 고대에 많은 이들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도 가이아의 정기에 취해서 신탁이 나오려고 했다. ‘한국은 5년 내로 통일이 될 거야. 내년에 평화조약을 맺거라.’ ‘열심히 살지 마라.’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쓰지 말고 막 살아라.’ 복채가 없으니 술술 나오진 않았다. 아폴론 신전 벽에는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기록된 법의 중요성을 존중하고 지키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벽에는 “너 자신을 알아라.” “뭐든 적절하게 하라.” “서로 달라도 조화를 이루어라.”라는 말이 적혀 있다고 한다. 분명한 말이지만 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델피에는 아폴론 신전만이 아니라, 청동 뱀기둥, 아테네 신전, 시장, 도시국가들이 신에게 바친 보물을 두는 보물창고들, 반원형 극장, 1km 더 위쪽에 있는 경기장도 있었다. 지진을 견뎌내기 위해 퍼즐 구조로 쌓은 돌담과 그 담벼락에 적혀 있는 오랜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신전 앞에서 풋열매가 달린 아몬드 나무를 본 것도, 박물관에서 많은 유물 중에서도 젊은 여성 머리에 사자 몸에 날개가 달린 신화적 생물 스핑크스가 잘 보존된 것을 본 것도 수확이었다. 그리고 아기를 업고 혼자 여행 온 젊은 여성이 정말 좋아보였다.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스파게티로 끝날 줄 알았더니 메인으로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이 나왔다. 그리스인들이 즐겨 마신다는 아이스커피, 프라페는 어찌나 쓴지 나도 그리스인들처럼 종일 물을 부어가며 마실 수 있겠다. 먹는 재미는 여행 동안 중요한 덤이었다. 또 다른 휴게소에서는 신선한 석류주스와 그리스 전통 과자, 하얀 크리스마스 쿠키를 단체로 먹었다. 그리스를 좀 아는 사람들이 전통과자 바클라바를 많이 먹고 오라고 한국에서 문자를 보내와서 좀 챙겼다. 그리스인들은 밀, 올리브유, 포도주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한다. 올리브가 46종이나 되고, 그리스는 75%가 엑스트라 버진오일이다. 스페인이 세계 최다 생산지이지만, 단위면적당 최다 생산과 일인당 최다 소비가 그리스이다. 유럽에서 성인병이 가장 적다는 게 올리브유 소비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올리브유로 볶고 튀기고 지지고 다 한다니 올리브유를 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서 해외 직구하는 것보다 관광지인데도 여기서 사는 것이 30, 40%는 싼 듯하다. 올리브 비누와 올리브나무로 만든 도마 등도 관광상품으로 유명하다. 공항에서 올리브유 같은 액체류는 짐 속에 넣어 부쳤어야 하는데, 기내 캐리어에 여러 병 가져온 사람 때문에 검색대에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우리 일행은 아니었고, 웬 젊은이였는데 막무가내여서 결국 따로 사무실로 가야 했다. 우리 중 카메라 담당이자 신진학자로서 세계 30개국을 다닌 여행의 왕자, 보수적인 합동 교단 배경으로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회원이 호주에서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공항에 내리는데 방송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더란다. 따로 불려가서 들으니, 부치는 짐에 생선을 넣어왔다고, 내장도 훤히 보인다고, 이건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라고 야단이었단다. ‘거참 이상하다, 그런 거 없는데’하며 가방을 열었는데, 거기서 먹다 남아 넣어둔 붕어빵 3개가 나왔다. 내장까지 보였다고. 단팥 내장. 우하하. 메테오라에 가는 도중에 해발 1,000m 높이에 있는 아라호바 마을을 지나갔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중 송송 커플이 키스한 장면을 찍었다는 곳이다. 우리는 귀찮아서 들르지 않겠다고 했다. 막상 버스가 그 마을을 지나자 좀 후회가 되었다. 그리스의 전통 가옥들, 오래된 동네가 너무 근사했다. 연인과 관련된 뽕나무 신화 때문에 웬만한 카페는 꼭 뽕나무 아래 있다더니 정말 아름드리 뽕나무를 끼고 있는 카페도 보였다. 멀리 이 꿈같은 마을을 배경으로 인생샷 하나를 건졌다는 데서 위로를 받기로 했다. 메테오라의 거점 도시인 인구 만 2천명의 작은 도시, 칼람바카에 밤에 도착했다. 저녁식사 후 밤이 아쉬워 동네를 거닐었다. 카페, 식당, 선물의 집, 보석가게 등이 줄지어 있었고 관광객을 상대하는 작은 시내였다. 우리 몇은 카페에 앉아 노닥거리며 “여기선 밤하늘의 별도 이렇게 많이 볼 수 있구나” 했다. 메테오라 수도원주일이라 해뜨기 전 예배를 드린대서 동네 교회에 갔다. 우리 말고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7시 무렵에 온 동네가 다 들리도록 큰 종소리가 울렸다. 오른쪽에 50대의 검은 가운의 신부, 왼쪽에 70대의 신부와 평신도가 계속 성경을 읽고 사이사이 비잔틴 성가를 불렀다. 전면 지성소는 가운데 문이 열려있었고 뒤태만 보이는 하얀 가운의 신부 둘이 오가며 탁자 위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양쪽의 사제들이 계속 여러 책을 넘기며 때로는 혼자, 때로는 하모니로 읽고 화답하고 노래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왔지만 한 시간 있는 동안 열 명이나 되었나 싶다. 흥미로운 것은, 예배 중인데도 몇 사람이 지성소 쪽으로 가서 벽면의 인물 성화에 차례로 입맞춤을 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중간에 들어오기도 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의자는 몸이 불편하면 앉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내내 서서 예배드렸다. 의자는 뒤집으면 무릎 꿇고 기도하거나 책을 두는 강독대가 되는 디자인이었다. 8시 무렵이 되자 다시 큰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지성소에서 신부가 은빛 판(복음경?)을 들고 나왔고, 모든 신부와 교인이 가서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 그 후 우리는 나왔는데 예배는 두 시간쯤 한다더니 역시 계속되고 있었다. 아침식사 후 수도원으로 향했다. 370미터 높이의 사암 꼭대기에 지은 수도원들이라니. 동행하는 여행사 사장님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고 했지. 방대한 바위산이 병풍처럼 두르거나 촛대처럼 솟아있는 절경이었다. 풍화 작용과 지진으로 그런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메테오라는 ‘공중에 매달린’이라는 뜻이다. 바위도, 수도원도 공중에 떠있는 듯했다. 무슨 이유로, 무슨 재주로 저 높은 바위 봉우리마다 수도원을 지었을까? 놀라움, 신비함, 신기함, 아름다움, 감동스런... 형용사가 부족했다. 11세기부터 은둔자나 도피자들이 동굴에서, 개별적으로 구멍을 내고 수행하는 것이 이 수도원들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내부적으로 엄격한 정교회의 규율, 외부적으로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이슬람의 위협(14세기) 같은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참 험난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15-16세기에 전성기로서 24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지금은 6개만 남아 있다. 우리는 발람수도원과 루사노 수녀원을 방문했다. 발람수도원은 14세기 중반에 발람이 정착하여 수도원을 시작했다. 교회에는 성인들의 그림과 더불어 신앙인이 다양하게 고문당하는 장면도 많았다. 기둥에 그려진 수도자, 흰 수염이 땅까지 길게 내려오고 바짝 마른 이집트 수도자가 인상적이었다. 고문서, 성서, 오랜 아이콘들을 전시한 곳도 있었다.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고 고통을 선택한 수도자들. 생필품이 필요할 때는 사람이 망태기를 타고 절벽 아래를 오가거나 물건을 올려보내는 모습이 자료 화면에 나왔다. 발람수도원에는 여전히 밧줄을 당겨서 쓰는 도르레가 있었다. 구멍이 성성한 망태기를 타고 오르내릴 때마다 믿음이 간절하게 솟구쳤을 것 같다. 1960년대에 정부에서 도로를 건설해서 이제 접근이 쉬워졌다. 루사노 수녀원은 15세기에 성 스테파노 수도원으로 시작했는데, 세계 제2차 대전 때 폭격당했고, 이어 시민전쟁 때 추가 손상을 입었고, 나중에 사회주의 반군에 의해 대부분의 프레스코화도 손상되었다. 1961년까지 버려져있다가 수녀원이 되어 현재 20여명이 상주한다. 입장할 때 복장 규정이 있어서 남자는 반바지는 안되고 여자는 민소매와 바지가 안되었다. 빌려주는 치마, 두르개가 있었다. 정교회는 여성 신부가 없고 남성 중심적 교회이니 뭐 쩝, 남의 동네 문화를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반바지를 긴바지로 갈아입어야 하는 남자가 없었다는 점에서 엄격하지도 않았다. 우리 일행 중 몇 남성이 이 두르개를 쓰고 사진을 찍는 바람에 규범의 해체가 벌어졌다. 그리스인들은 정교회 종교지도자들을 존경한다고 한다. 터키 등의 압제 하에 있을 때 수도자들은 숨어서 성서를 필사하며 언어를 보존했고, 비잔틴 성가를 다듬었고, 아이콘 성화를 그리며 그리스 정신과 문화를 보존했기에 더욱 그렇다고 한다. 도덕적 부패도 흔치 않다고 한다. 길에서 신부가 지나가면 인사하며 예를 표한다고 한다. 하늘에 닿을 듯 떠 있는 공중 수도원을 보며 ‘종교가 무엇이길래, 신앙이 무엇이길래’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나는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쉽게 살고 있는가를 성찰했다. 이번 그리스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세상에 둘도 없는 메테오라 수도원이었다. 남편이 함께 왔더라면 정말 좋아했을 곳이었다. 사진으로 약을 올려줄까 하다가, 성화를 사다달라는 부탁을 기억하고 수도원에서 하나 샀다. 이 놀라운 수도원 장관을 뒤로 하고 떠나는 아쉬움을 양고기 스테이크 점심이 달래주었다. 이제 7시간쯤 걸려 아테네로 내려가 묵으면 마지막 밤이다. 내일 아테네 관광을 하면 한국행인 것이다. 오다 보니 해바라기 밭도 많고, 밭 한가운데 수십 개의 벌통을 놓은 것도 종종 보인다. 엊그제는 산토리니의 이오마을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보았는데 오늘은 해가 산으로 넘어간다. 몇 시간 동안 한적한 길에서 버스로 굽이굽이 산과 들을 보며 다니니 행복이 차오른다. 함께 간 일행도 서로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깊어 갔다. 여행 초반에 60대 전후 몇 명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한 적이 있었다. 돌직구를 잘 날리는 한 여성 학자가 무슨 말 끝에 “통합측(장로교회)은 외식하는 사람들이예요”고 했다. 그러자 통합측 남성 학자가, “아니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정색을 했다. 여성분은, “내 친구들이 통합측인데 본인들이 한 말이에요.”라고 한다. 나는 “에구, 좀 심한 농담이시네요.”고 지나가게 했다. 근데 또 무슨 말 끝에 그 남성분이 “남편이 아내에게 손찌검을 할 때는 엄청 오래 참다가 하는 거예요”라고 했다. 우리 여성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그건 아니죠. 아주 위험한 말씀을 하시네요.”라고 했다. 며칠 후 그 남성분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문화충격을 겪었어요. 내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종류의 여성들을 한꺼번에 많이 보네요.” 나쁜 뜻 같지는 않았다. 또 얼마 후 내가 멀리서 보니 그 여성분과 그 남성분과 다른 남성분이 같은 식탁에서 열심히 대화하며 식사하고 있었다. 왠지 웃음이 났다. 보수든 진보든 모두 벗이 되어가고 있었다. 학회 회장이 여행을 마칠 무렵에 “여러분의 관대함과 아량에 감사드립니다”고 말한 것이 왠지 뼈와 살이 있는 말 같았다. 전반적으로 일행은 성숙한 인간미를 보였고, 서로 잘 챙겼다. 밤에 아테네에 도착하여 한식을 먹었다. 파르테논 신전 근처에 있는 아레오바고 언덕(아레스​의 언덕, 마르스​의 언덕)이 호텔과 가까워서 밤 산책을 갔다. 저편에 신전이 조명으로 매우 아름다웠고, 언덕 아래 아테네 야경도 사방으로 멋지게 내려다보였다. 언덕은 한밤인데도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400만 명이 사는 도시가 뜻밖에 북두칠성까지 보이는 밤하늘을 갖고 있었다. 내일 다시 오마 약속하며 숙소로 돌아왔다.아테네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오전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다. 유적지에는 파르테논 신전, 니케 신전, 디오니소스 극장, 에레크테이온 신전,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현재도 사용)이 있었고, 어젯밤 올라간 석회암 언덕, 아레오바고는 얕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이 언덕은 고대 아테네의 법정 역할을 했는데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년)가 여기서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도시​에서 섬기는 신​을 무시​하며 새로운 종교​를 실천’한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탈출 제의를 거절하며 “악법도 법이다”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셨다. 사도 바울은 아고라(광장)에서 아테네의 에피쿠로스(쾌락주의) 학파와 스토아(금욕주의) 학파와 열띤 논쟁을 벌였다. 또 예수와 부활에 대해 설파했다. 부활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회의적이었지만 청중은 새로운 얘기를 하는 바울에 귀를 기울였다. 바울은 또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는다. 인간이 빚은 금상, 은상,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기면 안된다”고 말했는데, 눈앞의 거대한 신전들을 보며 그렇게 말한 바울의 담대함이 더욱 가까이 느껴졌다. 오늘날 바울을 기념​하기 위한 동판​이 언덕의 서편 기슭​에 있다. 아크로폴리스에 이르러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다. 9시에 그리스 군인들이 국기를 게양하는 예식을 마치고 구령을 붙이며 걸어 지나갔다. 한국은 남대문, 덕수궁 앞에서 교대식을 하는 수문장들이 화려한 옛날 옷을 입고 있는데, 그리스는 검은 베레모의 군인들이 총을 들고 군복을 입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도 신전이 모여 있는 일종의 아고라(광장)이다. 중앙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5세기에 세워졌고,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 여신(전쟁의 승리와 지혜의 여신)에게 바쳐졌다. 당시에는 12m나 되는 조각상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 아테나)’가 있었다고 한다. 5세기 이후 이 신전은 교회로 쓰였고, 황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파르테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다. 그 후 신전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 사원과 탄약고로 200여 년간 쓰였고, 폭격을 맞기도 했다. 한쪽에서 복원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테네 여신으로서는 자신의 집주인이 바뀐 이 역사가 꽤 씁쓸할 것 같다.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남쪽 벽을 떠받치는 6개의 여신상으로 유명하다. 현재 4개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고 나머지는 대영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직접 본 여신상은 정교함과 예술성이 놀라웠다. 우아하게 땋은 머리 장식에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가 당대 남성 조각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인상을 나타내지 않았나 싶다. 아테네 시내를 자세히 볼 시간은 없었다. 그리스 건물은 지진 때문에 7층 이상을 짓지 못하도록 규제한다고 한다. 고층 건물이 없으니 도시가 고즈넉했다. 아파트마다 층층이 베란다 정원이 있었고 이웃과 소통하는 문화를 드러내는 듯했다. 그리스에서 하도 잘 놀고 잘 먹어서 그런지 그리스에 대해 가이드가 한 말이 다 믿어졌다. 추수할 때 많이 남겨두어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게 하고, 시장에 가면 노인이나 어려운 이들에게 거저 주기도 하고, 마트 입구에는 사람들이 구입한 물건을 두고 가서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게 하고, 지나다가 과일을 따려고 하면 주인이 봉지 들고 와서 그냥 따주고, IMF가 8년째 이어지지만 굶어죽는 사람들이 없고, 얼마 전 근대 올림픽 경기장에서 음악회 할 때 난민에게 줄 식료품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백만톤이 넘게 모였다는 둥, 그리스에는 관대함과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부러웠다. 또 학교는 학생들에게 노는 것을 가르쳐준다. 분명 중학생들 얘기였다. 학생 의결기관이 클럽에 가는 것을 결정하면, 학교 측과 경찰은 버스로 학생들을 금요일 밤에 클럽에 데려간다고 해서 놀랐다. 학생들은 레몬에 알코올(2, 3도) 섞은 음료를 마시며 자정부터 새벽 6, 7시까지 밤새 논다는 것이다. 졌다. 또 그리스에서는 대학원까지 무료라니, 등록금이 없어서 밤새 편의점 알바하고 와서 수업 때 조는 한국 학생들이 떠올랐다. 그리스는 1년쯤 살아보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 우리 일행은 오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크로폴리스에서 신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내려왔다. 일주일간의 그리스 여행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좋은 분들과 맛난 것 먹으며, 서로에게서 배우며, 많이 웃고, 떠들고, 신났다. 그리고 그리스의 고대와 현대를 오가며 신들과 사람들과 친해졌다. 그래도 한국의 집에 가고 싶어졌다. 엊저녁에 가족과 통화했는데, 냥이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인지 안하던 짓을 했다. 엄마가 아끼는 화초를 쥐어뜯어서 바닥에 수북이 쌓아놓았단다. 남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열흘 더 있다오지 그래.” 내가 없는 동안 평화를 누렸는데 이제 폭염보다 무서운 마누라 잔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니 그리스에서의 장기체류를 권한다. 나는 그리스에 내 잔소리 재능을 좀 두고 가는 걸까. 그리스는 나를 좀 변화시켰을까. 나도 궁금하다. 유연희 - 감신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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